쿨데삭빌 프로젝트

E_invite쿨데삭빌 프로젝트 (2017-2019 현재 진행 중)

마틴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사물에 관한 물음> 에서 ‘사물’과 ‘대상’을 분리했다. 사물이란 오두막, 교량, 구두와 같이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이며, 특이하게도 그는 풍경 속에서 뱀처럼 꿈틀거리는 고속도로를 언급한다.

이는 ‘대상’ 이 아닌 ‘사물’이며 우리는 그 안에 속해 있고, 그것들은 우리의 특정한 형태의 삶을 가능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후설(Husserl)이 말한 ‘주거 환경’혹은 ‘생활 세계’ 에 관해 인용하면서, 우리는 평생 동안 직관적으로 살고 있는 곳에서의 모든 사회적, 물질적인 측면을 알아채지 못한다고 했다. 1우리가 주변을 둘러 볼 때 ‘신발’, ‘자동차’, ‘의자’ 같은 것들은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다가 신발이 찢어지거나 그 기능이 작동하지 않을 때만 제대로 인식한다고 한다.

2017년 후반부터 삼선동 일대를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들의 다른 세대, 다른 습관, 전통, 기이한 것들, 그리고 다른 ‘거주환경’을 목격했다. 이주영은 삼선동에 살고 있고, 클레가는 서울에 올 때마다 이곳을 방문했다. 리서치가 시작되자 우리가 본 물질과 매너리즘을 기록하고 분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산책자’ 처럼 무관심하게 목적 없이 걷기 시작했고, 특이하게 흩어져 있는 이미지들을 기록했다. 보이는 곳에서 숨겨진 것들을 감지하는 탐정과 같은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외국인처럼 의심을 품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익명성을 띈 사진 기록물은 무기화 될 수 있다.

가끔 부딪히는 동네 주민들이나 활동가들과의 만남을 통해 이주영의 지역에 대한 지식과 우려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욕망은 천천히 여과되고 있었다. 아직 하고 싶은 작업이 많은데, 이 장소의 수명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낭만적인 향수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삶의 증거를 계속 수집해 나아갔다. 버려지고 붕괴된 건물 주변 불법 폐기물들에 향수는 없다. 텃밭을 대신하는 화분들 아래 울퉁불퉁한 계단들, 되는대로 고쳐서인지 쓰러져가는 지붕들과 벽돌 담장들에서 ‘재개발’로 곧 사라질 세상을 감지했다. 한국에서 ‘재개발’ 은 체계적인 뿌리 뽑기와 과거의 근절을 위한 완곡어법이다. 과거의 부스러진 것들은 계속해서 수리되고 더는 기억할 가치가 없다. 언젠가 침입할지도 모르는 상상의 도둑들을 막기 위해 철선이나 유리파편으로 무장된 지붕이나 담벼락, 스티로폼 박스에서 자라는 먹거리 채소, 서로 다른 것들의 조합으로 연결된 사물들 등 이 모든 것들은 나이테처럼 언제나 삶의 증거이다.

이렇게 수리된 버내큘러 (vernacular)스타일, 손으로 잘 칠해진 시멘트, 플라스틱 시트, 덮개, 파이프, 끈 등은 발명의 흔적이자 ‘뭐든지 하겠다’는 사고방식이다. 또한 이는 완전히 기능적인 브리꼴레르 (bricoleur)의 비미학적 접근법이다.

이제 나무는 베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지역이 사라지기 전에 ‘보기’ 위해 출발했다. 삼선동은 사실상 서울의 옛 성벽 한양 도성을 따라 오늘날 서울의 중심에 있는 종로구에 접경해 있고, 성북구에 위치한다. 일제 강점기 말 이곳은 공습에 대비해 지어진 방공호가 많았다. 해방 후, 돌아온 동포들이 삼선교 주변 언덕에 위치한 동굴 같은 피난처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작가 김동리는 그의 소설 <혈거 부족>에서 그들을 ‘혈거 부족’(동굴에 사는 부족)이라고 묘사했다.2 대부분의 낡은 주택들은 단순하고 전통적이며 종종 불법적으로도 지어졌다. 문과 창문이 마주하는 작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 행사 또는 무속 의식을 위한 ‘사회적’ 공간이기도 했으며, 변화하는 사계절을 보며 새 소리를 듣는 장소이기도 했고, 3 감나무, 작은 꽃밭이나 장독대를 위한 곳이기도 했다.

여기 주택들은 여전히 작고 힘이 없다.

70년대부터 시작되어 2012년까지 복원된 한양도성 서울 성곽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실패하는 동안 (202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재도전한다고 한다 )한양도성 성곽 아래 지역 주택은 정비되었다. 성곽에서 더 먼 거리에 있는 수많은 골목길은 여전히 좁아서 주차 공간으로도 사용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보행도 차단한다. 이 지역에 인접한 장수마을은 ‘주민 공동체가 주도하는 도시 재생’을 겪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보다 더 최근에 지어진 한성 대학교 아래 지역은 철거될 것이다. 새로 들어설 주택들은 주차시설이 완비된 최신 설비를 갖추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현재 이 나라는 서울과 모든 지역 여기 저기가 대형 고층 건물과 함께 영구적인 공사장인 듯하다. 사실상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낙후된 주택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브리콜라주(bricolage)와는 달리, ‘새로운 것’ 은 늘 엔지니어링 되고, 대량 생산되며 공급되어 미래의 열망으로 제시된다.

결국 도래할 미래에는 감나무를 위한 공간은 없다.

행복한 가족을 표방하는 수익성 높은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곤란함, 가난, 취약한 과거도 불도저가 싹 다 밀어버린다. 독재자와 같은 자본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와 전통을 뿌리째 뽑아버린다. 전통은 오직 박물관이나 유적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통이라는 개념의 이식은 박정희 독재 정권 하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어 집행되었지만, 고층 아파트는 사회주의 도시주의자의 꿈처럼 보인다. 고층 아파트는 한국 전쟁 이후 소련과 동독에서 수입된 북한의 주거 스타일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 라는 르코르뷔지에의 기능주의적 이론과 함께 )

이러한 부조화는 우리의 시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매너리즘을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선 자체에 질문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에서 우리는 ‘타자’ 로 남아 판단한다. 우리는 그 장소와 서로에게 타자로 남아있고, 우리에게 하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들은 이 시선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진 예술가의 시선은 꽤나 생산적인 형태의 경험이다. 또한 판에 박힌 일상을 벗어나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새롭게 지각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걷기와 수다’는 대부분의 익숙한 것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 또는 벽면의 틈새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에 관해서 ‘배우는 걷기’가 되어버렸다.

걷고 보고 기록하는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것들을 서로 다르게 본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발견한 ‘거주환경’에 의해 달라지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사는 ‘거주환경’에서 커지는 균열을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하면서 천천히 우리는 의견을 같이하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달린 수많은 붉은 벽돌들은 일상 생활을 숨겨주며, 타인의 시선만 빼고 가족의 삶을 보호한다. 정부가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를 부르짖어도 공동체는 잘 형성되지 않는 듯하다. 고층아파트가 적합하지 않은 오래된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체’, ‘주민 주도형’, ‘재생’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선언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대부분의 주택은 버려질 것이다. 그들의 창문들은 텅 빈 눈구멍처럼 무작정 미래를 쳐다볼 것이다.

동네 주민, 예술가, 활동가도 만났다. 폐절, 장수 박물관도 구경했고, 한때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는 지역 역사의 더 오래된 층위로 남아있는 뾰족바위도 발견했다. 이 바위는 이제 주택가와 골목길 사이에서 사실상 콘크리트화되어 있다. 또한, 몇 년 전 지역에서 활동한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지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집을 팔 수 있을 때 가능한 한 빨리 개발업자들에게 판다고 했다. 예술가의 지역 개입은 오직 재산 가치를 높이는 가능성으로 보았다. 재개발이 어떻게 충분히 사람들을 설득하여 재산을 양도하는데 성공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연구 주제이다. 지금은 장소 자체와 그 기능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기록 초반기부터 이주영은 우리가 본 것들을 마치 포렌식 (Forensic: 법의학적) 증거사진들처럼 번호를 매기면서 범주화하기 시작했다. 20여 가지의 번호를 부여하면서 기록한 특정 항목이나 상황에 맞게 서로 다른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이미지를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이러한 포렌식 태도는 눈에 보이는 특별한 흔적을 고립시키고 집중하는데 유용한 방법이다. 말 그대로 ‘삶의 증거’가 되었다. ‘묻힌 (분해)’, ‘벽돌로 막은 (혹은 막혀버린) 창문’, ‘인공 재료’, ‘지역 특유의 질감이나 텍스쳐’ 등 이주영이 만든 카테고리는 처음에 서구적인 사고의 틀로 바라보았을 때 비직관적인 듯했다. 그러나 그 카테고리는 보는 이에게 장소가 나타내는 방식을 완벽하게 묘사한다. 이 카테고리는 해석의 방향을 제시하고, 오랜 일상에서 과거의 서사와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할수 있게 한다. 때로는 사진의 이미지들은 오버랩 되어 명확성이 떨어지기도 하고 작은 뱀처럼 꿈틀거리는 작은 골목길 조차도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공동 작업 위주로 소개한다. 큐알 코드 포스터는 삼선동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제작된 첫 번째 영상 <포렌식 시선>을 광고한다. 이 영상은 이주영의 포렌식 이미지와 클레가의 벽을 소개한다. 영상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전시장에 비치된 카테고리화 되어 있는 인덱스 카드가 들어간 서랍에도 등장한다. 두 번째 짧은 영상 <쿨데삭빌>은 두 사람이 각자 기록한 번호가 부여되지 않은 이미지와 함께 한국 시인들의 시구절을 보여준다. 시인 이상의 기술방식은 이주영이 서로 다른 한국 시인들의 연결이 되지 않는 시구절들을 함께 사용한 패러다임의 전형이다. 이상은 기술적 근대성과 정치적 재앙의 식민지와 전쟁의 문턱에서 한국 지식인들의 주변성과 비관론을 묘사한다. 이는 독일의 시인 고트프리트 벤과 초현실주의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표현주의 시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구절들은 우리가 이 지역에 던지는 시선과 관련이 있으며 ‘서로 어긋난 시간’ 의 고통을 표현한다. 이 중 <직선으로 달려가지 마라>는 박노해의 시 <직선이 없다> 에서 인용했다. 이것은 모더니스트 그리드, 고층 아파트 블럭과 공장의 숨 막히는 격자에 대한 조언일 수도 있다. 영상의 사운드 트랙은 가수 연성의 트로트이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트로트는 어르신들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고정 장르이다.

여러 사진으로 그룹화된 사물들이 보이는 영상 <포렌식 시선>에서 클레가는 장소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거주의 모습, 추측, 혼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엔트로피 (무질서)영향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에 집중한다. 둘 다 여기서 자라지는 않았지만 우리에게 지나가는 순간을 부여잡고자 단순히 존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클레가의 이미지는 대부분 벽돌 이미지로 시멘트로 덮여있는 수많은 벽돌이 공기와 비와 먼지를 자유롭게 흡수하여 표면자체에서 푸른 녹청패턴을 만든 벽들의 인상학(physiognomy)을 보여준다. 이 벽은 변해가는 이 지역의 삶의 본성에 대한 카테고리화된 각각의 항목들(이주영)과 나란히 평행을 이룬다. 벽에 숨은 이미지들은 오히려 가시적이고 투명할 정도다.

이 동네를 걷다 보면 가끔 벽에 부딪혀 버릴 거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러한 충돌이 현실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많은 막다른 골목길처럼 그림은 미로이다. 따라서 우리는 숨겨진 습관들을 시각화해야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예술가의 시선으로 단순히 기록화된 아이디어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곳을 어떻게든 시각화하려는 이 행위는 ‘빈곤 포르노’ 같은 침범이 아닐까?

이주영의 카테고리와 경사진 벽들을 교차함으로써 클레가는 적절한 시선에 관해 질문하고 보여지는 것과의 균형을 찾고자 한다.

아직도 작업은 진행 중이고, 프로세스 자체가 작업이다. 우리 자신의 시선에 관해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과물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차별화된 감수성일 것이다. 벤야민은 아우라(Aura)에 대해 설명할 때, 무언가를 바라보는 어색함은 갑자기 우리를 되돌아보는 한 쌍의 눈으로 만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4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대상으로 보이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이 인간미라는 것을 깨닫는다.

레지던시 기간 이주영은 ‘보이지 않는 것’ 과 관련된 ‘촉각적 상상력’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작가는 참여자에게 눈을 가린 채 삼선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오브제를 직접 만져보고 느낀 경험을 글로 종이에 묘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불연속적인 문장으로 직접 번역된 내면의 경험은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과도 관련이 있다. 후에 이 문장들은 함께 자르고 이어져서 한편의 시가 된다.

이주영 & 클레가

1 에드몬드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1954

2 김동리, 혈거부족, 종로서원, 1948

3 서현, 빨간도시, 효형출판, 2014, p.25

4 월터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하여(1940), 월터 벤야민 선집: 4,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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